야구를 오래 봐온 팬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 있다.
“야, 저건 불문율 깨는 거 아니냐?”
하지만 처음 야구를 접한 이라면 뜬금없을 수 있다.
규칙엔 없는데, 왜 갑자기 싸움이 나고 난리가 나지?
바로 오늘 이야기할 야구의 암묵적인 룰, 혹은 불문율 때문이다.
이건 정식 규정은 아니지만, 선수들 사이에서 사실상 규칙처럼 여겨지는 관습들이다. 미국에서 시작됐고, 지금도 KBO를 포함해 전 세계 프로야구 리그에 영향을 주고 있다.
왜 이런 암묵적인 룰이 생겼을까?
야구는 은근히 긴장감이 흐르는 스포츠다.
한 경기 한 경기의 압박도 크지만, 시즌 자체가 길고 동료와의 유대가 중요한 경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 하나, 방망이 하나가 흉기가 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경기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형성된 규칙들이 있다.
말하자면, “상대팀을 대할 때, 선 넘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다.
사실 이건 그냥 ‘예의’일 수도 있고, 혹은 보복을 피하기 위한 자기 방어일 수도 있다.
1. 노히터 중엔 입 다물기
노히터 또는 퍼펙트 게임을 진행 중인 투수에게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선수들도, 코치도, 팬도. 이건 마치 야구계의 금기어다. 괜히 언급하면 흐름이 끊긴다고 믿는다.
내가 보기에 이건 미신에 가깝다.
하지만 이상하게 말만 꺼내면 안타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유명한 사례가 일본 오릭스 치히로의 퍼펙트게임 도중 중계진의 언급 → 바로 안타.
KBO에서는 이런 문화가 덜하다.
중계진도 대놓고 “퍼펙트입니다!” 외치고, 팬들도 SNS에 설레발치기 바쁘다.
그래도 최근엔 조금씩 조심하는 분위기다.
2. 점수차 많이 벌어졌을 때 도루/번트 금지
6회 이후, 7점차 이상 리드. 이럴 땐 도루도, 번트도 자제해야 한다.
이건 완전히 미국식 문화다.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여긴다.
근데 사실 현실은 좀 다르다. KBO는 점수차가 8점 나도 뒤집히는 일이 많다.
그래서 도루를 해도 비난받지 않는 분위기다.
예외는 있다. 어린이날 11:0 상황에서 기아 신인이 무관심 도루를 시도했다가 사과한 사건. (조선일보)
이건 좀 배려가 부족했지.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문맥이다.
3. 세리머니? 과하면 맞는다
홈런 치고 방망이 던지기(빠던), 주먹 불끈 쥐는 세리머니.
한국에서는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MLB에서는 과거 이런 행동에 빈볼로 응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있다.
MLB도 이제는 개성이 중요한 시대다.
타티스 Jr. 같은 젊은 스타들이 화려한 세리머니를 보여주고, 오히려 팬들이 열광한다.
보복구보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스포츠로 변화하는 중이다.
그래서 나도 요즘은 이런 흐름이 더 좋다. 재밌고, 더 인간적이다.
4. 기록 깨는 번트는 비겁한가?
퍼펙트나 노히터가 진행 중일 때, 기습번트로 출루하면 비매너?
미국에서는 비겁한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이건 상대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플레이일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당한 방법이면 괜찮다고 본다.
기록은 소중하지만, 경기 승패가 더 중요하다.
5. 사인 훔치기
상대팀의 사인을 읽는 건 룰 위반이 아니다.
하지만 전자기기나 카메라 사용은 명백한 부정행위다.
대표적 사례: 휴스턴 애스트로스 사건.

망원경 + 전자신호 + 쓰레기통 두드리기라는 충격적인 조합.
웃긴 건, 사인 훔친 팀보다 당한 팀이 바보 소리 듣는 문화다.
KBO도 마찬가지. 훔치지 말자는 윤리는 있지만, 당한 쪽도 책임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6. 빈볼은 야구다?
이건 논쟁의 여지가 많다.
상대 팀 선수가 불문율을 어기거나, 우리팀 선수를 건드리면, 투수가 보복한다.
그게 빈볼.
노골적인 머리 겨냥은 퇴장감이지만, 몸쪽 공 정도는 용인된다.
KBO는 이런 게 덜하다.
선후배 문화, 좁은 인맥 구조 때문.
하지만 한창 때 SK나 김성근 야구처럼 거칠게 던지는 팀도 있었다.
이런 팀들은 자연스럽게 맞고, 던지고, 싸우고의 무한 루프.
7. 벤치 클리어링은 팀워크의 상징?
싸움 나면 전원 출동.
이건 KBO도 마찬가지다.
안 나오면 벌금 내는 팀도 있었다.
웃긴 건 다음날 선발 투수는 안 나와도 되는 룰도 있다는 것.
마운드로 300피트 뛰어오는 불펜 투수는 매번 봐도 코믹하다.
8. 하드 슬라이딩과 포수 태클
2루 병살 방지 슬라이딩, 포수 충돌
다 허슬 플레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며 제재가 생겼다.
KBO도 2016년부터 포수와의 충돌을 금지했고, 병살 방해 슬라이딩도 금지다.
선수 보호가 더 중요해진 시대라는 뜻.
9. 마운드는 밟지 마라
투수가 만들어 놓은 마운드를 야수가 지나가면서 흐트러뜨리면 기분 나쁘다.
그래서 보통 피해간다.
이건 진짜 일종의 매너다.
불문율이라기보다 배려랄까.
그런데 신인 선수들이 이걸 모르면 눈치받기도 한다.
야구, 감정의 스포츠
야구의 암묵적인 룰은 결국 감정의 룰이다.
규칙에 없지만, 사람 사이의 정서가 만든 규칙들이다.
그래서 어떤 건 시대에 따라 사라지고,
어떤 건 점점 더 중요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룰들이 야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이해 안 될 때도 있지만
그 감정의 층위가 야구를 특별하게 만든다.
마무리하며
이제 야구를 볼 때 이런 장면이 나오면
“아, 저건 불문율이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야구 덕후’로 한 걸음 가까워진 셈이다.
야구의 매력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규칙 바깥의 이야기들에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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